사주를 팔면 생기는 징조 타고난 운세 개운이 되는 이유 비방법 - 부천 부산 용한 무당 점집 추천 후기 연화암 이보
Page info
Writer 굿엔트 Date22-06-19 00:00 Hit19 Comment0Link
-
https://youtu.be/gFWWd0-RbsQ 1- Connection
Body


#아이의_사주를 #팔아야_하는_이유 #타고난_운세 #앞길을_열어주는_방법 #용한무당추천 #부산점집 #부천점집 #근처점집 #점집추천 #점집후기 #재수굿 #신내림굿 #연화암 #이보
연화암 이보
[상담전화] 010.8777.9782
[상담장소] 부산시 부산진구 중앙대로 993
시청역 롯데골드로즈 1720호 연화암
[촬영문의] 010-9768-1638
안녕하세요 “굿엔트”입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 신앙을 알리는 곳으로 민속신앙 선생님들의 무당 이야기와 국보신앙 세습에 대하여 바르게 소개합니다.
항상 좋은 날 되세요!
[굿엔트]네이버 https://blog.naver.com/goodent1638
[굿엔트]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goodent1638/
[굿엔트]트위터 https://twitter.com/Goodent6
[굿엔트]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goodent1638
[굿엔트]스토리채널 https://ch.kakao.com/channels/@goodent1638
명다리(命桥)
무당과 단골사이에 수양(收養) 관계를 맺는 표시로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수양자의 생(生), 시(時), 성명과 ‘수명장수(壽命長壽)’ 또는 ‘수명장수 재수발원(壽命長壽 財數發願)’, ‘칠성님전 수명장수 발원’이라고 써서 신에게 바치는 무명천.
형태
명다리는 무명천, 실, 한지 등으로 이루어진다. 평소에는 무명천 안에 타래실을 넣고 이 타래실을 넣은 무명천을 접어서 다시 한지로 포장해 쌓아 둔다. 혹은 벽에 줄을 쳐 놓고 명다리와 실타래를 함께 걸어 놓는 경우도 있다. 면포의 양은 많을수록 좋지만 적을 경우 7척 7촌(약 223㎝) 혹은 1필을 사용한다고도 하지만 일정치는 않다.
내용
명다리는 부모들이 태어난 아이의 나이가 홀수인 1살, 3살, 5살 등에 단골무당에게 바친다. 바친 명다리는 칠성님 전에 놓고 아이의 수명장수를 빌어주며 이후 칠성님 아래 함이나 신단 밑에 보관한다. 한 번 바치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다시 갱신하여야 하며 새로이 만들어 바쳐야 영험이 지속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행위를 일컬어 어린아이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무녀에게 ‘아이를 파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무당에게 팔린 어린아이는 무당의 자녀가 되어 무당의 ‘신딸’과 ‘신아들’이 되고 무당은 ‘신어머니’가 되는 단골관계가 성립된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수명장수를 신력(神力)이 있는 무당이 책임진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무당은 단골 아이들의 수명장수를 빌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어서 무녀 자신의 신당굿(진적)을 할 때 반드시 이 어린아이들의 명다리를 가지고 춤을 춘 다음 축원을 한다. 내림굿 중에 칠성거리 등에서 명다리를 들고 춤을 추기도 한다. 무당이 이사를 하게 되면 명다리를 팔 수도 있고, 죽었을 때에는 무계를 계승받은 무당이 명다리를 인계받거나 소각한다.
명다리는 단골들이 명을 길게 해 달라고 바친 것이므로 그 규모를 통해 무당들의 단골 판도를 알 수 있다. 어떤 무당은 따로 명다리 방을 마련하여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만큼 많은 단골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시 마포구 밤섬부군당 당주 김춘강의 경우는 면포 1필을 차곡차곡 접어 그 안에 실타래를 넣었다. 면포 겉에는 ‘칠성님전 수명장수 발원’이라고 쓰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적어 놓았다. 강화군 외포리 곶창굿 당주 정정애의 경우 무명 안에 타래실을 넣고 무명을 접어 다시 한지로 포장해 두었다. 무명의 총 길이는 15마로 약 1,350㎝이며, 천의 가로 길이는 43.5㎝이다. 포장해 둔 상태에서 길이는 가로 48.5㎝, 세로 23㎝이다. 이 한 세트가 한 사람의 단골을 위한 것으로 이 명다리를 보관하는 방을 신당 바로 옆에 마련해 놓고 있다. 강원도 영월군 덕포 3리의 고재만의 경우, 신당 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 벽에 줄을 쳐서 그 줄에 명다리와 실타래를 걸어 놓았다. 단골들은 명다리를 바치면서 고깔도 같이 바친다고 한다.
자식(子息)
부모의 반댓말. 부모의 아이를 부모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빈말로 웬수와 이음동의라는 말이 나돈다. 어떻게보면 원수보다 더 못된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원수야 미워하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자식을 끝까지 미워만 할 수 있는 부모도 막장부모들을 제외하면 별로 없다. 이 대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 길 바란다.
하지만 자식이 태어나기까지의 인과관계를 살펴보면 순전히 부모의 의사로 진행되는 터라 사실상 부모의 자업자득이며 외모든, 지능이든, 건강이든, 성격이든 자식에게 하자가 있다면 십중팔구는 부모가 그 원인이다.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불효라는 말도 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은, 자연에서 멸종하고 만다. 번식은 인간이 우주에서 지금까지 생존하게 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하고 반박불가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번식의 결과물이 자기보다 먼저 죽어버리면 절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는 자식을 낳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부모의 인생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모든 부모들에게 있어 자식이란 나이를 몇을 먹어도 어린애인 존재로서, 부성애와 모성애가 향하는 대상이다. 부모 앞에서 그 자식을 욕하면 큰일나는 이유.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은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만 자라서는 제 뜻대로 행동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철이 들어서 바르게 행동하면 좋지만 밖에서 사고나 치고 다니면 속이 탄다. 더불어 부모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늘 어린아이 같은 존재.
자식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부모의 본질도 같이 이해하도록 하자.
보통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사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불의의 사고나 질병, 혹은 자살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남겨진 부모의 슬픔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자살로 사망했을 경우 자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후회감까지 더해져 슬픔이 더욱 배가 된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이 사망하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며, 병이 있는 부모의 경우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마치 기독교인이 신에 대비해 스스로를 극도로 낮추는 것처럼 부모가 신에, 자식이 그 피조물에 해당하는 포지션에 위치해있는 경우가 있으나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이 사회에 걸맞는 인간임을 간증하기 위해 저렇듯 과장해서 자식이 부모에 효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집착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노력을 하고 시간과 돈 등을 소비하면서 자식을 키우며 부모는 많은 희생을 하는데 그런 부모에게 자식이 효를 다 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회의를 보일 시엔 패륜으로 매도 당할 때도 있고 완전히 매장을 당할 수도 있다. 인류 문화적으로, 21세기 이전까지는 우리 관점으로 아동 학대로 보일 일이 흔했고 그런 일에 자각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당장 10살도 안 된 아이한테 무거운 봇짐을 모두 들게 하는 게 양반의 풍속이었다.
현대에 대두된 개인주의적 관점에 의거하면 근대까지만 해도 자식은 번식 본능의 부산물 내지, 미래의 집안 일꾼(노동력), 늙고 병들었을 때 간병해주고, 부모를 경제적으로 부양해줄 노후 대책, 그리고 가문 세습을 위한 것이었다. 가문 및 재산, 관계의 세습을 위한 유기적 관계로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성을 의거하는 이러한 의식은 최근에서야 흐려지고 있다. 현대 들어서는 핵가족화되면서 개개인에 천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여태까지는 그저 의문 없이 당위로 여겨지던, 소위 대를 잇고 수발을 받는 시스템에 회의를 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자식의 탄생에서 당사자인 자식의 의사는 전혀 반영될 수가 없고 순전히 부모의 의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각한 자식 본인 및 부모의 도덕적, 심리적 부채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출산율이 급격하게 저하하는 건 이런 이성적 사고가 크게 작용한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출산률의 저하 및 급증은 그 세대의 생의 욕구, 즉 생을 영위하게 되는 상황 및 개인적인 삶의 만족 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례로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6.25 전쟁 이후 국가 및 국민 전체에게 있어 망가진 삶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다시 일어서겠다' 혹은 '절대로 내 자식들은 이런 꼴을 당하게 하지 않겠다'는 갱생에 대한 의지가 자연발화된 과정으로서 발견되고 있다. 즉 출산율은 현 세대(부모가 될 수 있는)의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 및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증감여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노예가 세습적으로 대물림되는 노예인 자식을 낳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의 일로, 자식이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책임질 수 있을 자신이 있을 때만 낳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낳지않는 것이 낫다는 것. 이른바 '낳은 죄'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제3세계에서 낳은 아이가 굶어 죽든 말든 별 생각 없이 섹스하고 임신하면 낳고 보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라는 존재를 아예 의도하지 않고, 본능대로 살다보면 생길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 현재도 미국 등의 빈민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에서는 오히려 이를 악용해서 양육비 셔틀로 자식을 낳는 저소득층들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자식에 대한 책임의식의 결여로 인해서 고대사회부터 출산은 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온전한 형태의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으며, 이 가정은 '결혼'에서 시작하였다. 즉 '결혼'을 한 상태의 성인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으며, 이러한 책임 의식을 가진 상황에서만 '자식'을 낳는 것이 올바른 형태였던 것.
Comment List
There are no registered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