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서학과 동학 (2/5) , 부제 : 한반도와 동아시아 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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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Date25-03-30 00:00 Hit40 Comment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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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서학과 동학 (2/5) . 부제 : 한반도와 동아시아 대전쟁
1편에서 이어집니다.
*베틀을 짜는 며느리가 바로 한울님이시다
해월 최시형이 무더운 삼복 더위날에 청주 변두리에 있는 측근 신도였던
서택순의 집을 지나다가 들러서 찬물 한 그릇을 청합니다.
서택순이 찬물을 드리자 물을 마시는 중에 조그만 창이 하나 나 있는 새카만 골방에서
‘덜커덕덜커덕’ 베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베를 짜는 이는 틀림없이 그 집의 며느리입니다. 최시형은 그때 서택순에게
“지금 자네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냐, 한울님이 베를 짜는 것이냐?”고 묻고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지금 자네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냐,
한울님이 베를 짜는 것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서택순은 아무 대답도 못했으며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베를 짜는 며느리가 바로 한울님이시니, 베짜는 그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며느리를
일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 한울님으로 알고 한울님으로 섬겨라”라는 뜻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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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 최시형
그는 포교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시간만 나면 멍석을 짰으며, 멍석에 쓸 새끼를 꼬았습니다.
멍석을 짤 짚이 떨어지면 꼬았던 것을 풀어서 다시 꼬았습니다.
그러시면서 “한울(하늘)님은 늘 쉬는 적이 없으시다” 라고 하셨습니다.
가는 곳 마다 빈집이 있으면 그곳에 살면서 과일 나무를 심고 멍석을 짰습니다.
1863년 추석날, 해월은 마침내 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수운 선생은 체포되어 대구에서 참형을 당합니다.
이후 30년간 해월은 지명 수배범처럼 ‘최보따리’로 관군에게 쫓기며 숨어 지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동학을 포교하게 됩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존엄함을 일깨우는 가르침을 평생 숨어 다니며 펼쳤고,
이것으로 동학은 사멸하지 않고 오히려 불길처럼 퍼져나갈 수 있게 된것 입니다.
* 서학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시작하여 스스로 북경의 주교를 찾아가 영세를 받고
선교사가 없이 평신도 만으로 미사와 성사를 행사하는 가경제도를 운영하는 등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한반도의 천주교는 여러모로 독특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어릴때 머나먼 타향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사제서품을 받아
한반도에 입국했는데 불과 1년도 안되어 순교하게 됩니다. 피의 순교자 입니다.
두번째 사제로서 한반도에 입국해서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천안 이남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지방의 120여개가 넘는 교우촌 공소를
도보로 걸어 다니며, 천주교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이렇게 매년 교우촌 공소를 걸어다니며 11년 6개월간 사목하시다가
결국 과로와 장티푸스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으로 선종하였습니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땀의 순교자라고 하더군요.
참으로 대비되는 한국인 최초 사제와 두번째 사제의 여정.
또한 한국 천주교는 일세기 걸친 박해로 인하여 일만명이 훨씬 넘는 순교자가 잇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않은 무명의 순교자 이기도 합니다.
암튼, 순교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씀들은
그야말로 가장 솔직하고 절실한 말씀이며 신앙의 정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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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목잘려 순교
"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했으니 여러분은 내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정군보 쁘로따시오 , 1839년 5월 20일 한양 형조 옥에서 병사
" 저는 천주교인 입니다. 천주교인으로서 죽기를 원합니다 "
*김업이 막달레나, 김아기 아가타 1839년 5월24일 서소문 밖 참수
" 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한 것이 제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하엿습니다
저는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박아기 안나 ,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참수
" 각자 다 자기 주장이 있는 법입니다
나로 말하면 주를 위하여 죽기가 소원 입니다"
*박희순 루치아 ,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참수
" 이제야 우리 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
우리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 천국의 영광을 얻도록 합시다 "
*남명혁 다미아노 ,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참수
" 주님, 감사합니다. 이 몸이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당신께서 우리위해 흘린 피, 당신께서 거니신 길에 오늘 당신의 종 다미아노는
당신 가까이 가려 하옵니다. 주님 보소서 저들의 어리석음, 저들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
*장성집 요셉 , 1839년 5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 과거에 제가 지은 죄는 모두 돈을 벌어 잘살아보겠다는 욕망에서 나온것 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편이 낫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참아 받음으로써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
*최경환 프란체스코 , 1839년 9월 12일 한양 포청옥 장독사
"저는 칼 아래서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언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제가 감옥에서 죽는 것이군요.
주님의 거룩하신 뜻이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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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운동과 동학 운동의 초창기의 에피소드는
운동을 대표하는 순교자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려 합니다.
해월 최시형의 말씀
" 내가 고종을 절대 용서할수없는 이유는
19세기를 분연히 떨쳐 일어난 민족종교 동학을 온갖 방법으로 짓밟았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의 자주성과 근대화 그리고 전통성까지
모든 발전동력을 모조리 짓밟아 회생불가능으로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유언
“ 부디 서러워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
** 서학과 동학의 진행과 결과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시작하였으나 종교적인 믿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천천히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는 여러가지 다양한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전통적인 제사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 (1791년) ,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며
노론 벽파가 득세하자 남인의 제거 명분에 천주교를 이용한 신유 박해 (1801년),
을해 박해 (1815년), 정해 박해 (1827년), 헌종의 섭정인 순원왕후에 의해
안동김씨 세력제거를 목적으로 시작된 기해박해 (1839년), 병오 박해 (1846년),
경신 박해 (1860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시행된 병인 박해 (1866년)
1791년 신해박해 부터 1866년 병인 박해 까지의 기간 동안
일만명이 훨씬 넘는 순교자가 발생합니다,
조선 왕조는 천주교를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 탄압했지만,
한국 가톨릭교회는 그러한 박해에도 교세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습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며 온전한 사목활동이 가능해졌으나,
계속되는 박해로 상당수의 신자가 순교하여 천주교는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선교사를 통해 들어온 개신교는 별 다른 박해 없이
적극적인 포교 활동으로 교세를 확장했으며,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기점으로
개신교는 천주교의 신자수를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동학의 전개와 갑오 농민전쟁 ( 동학 혁명 )
정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집결하는데 성공한 동학은
사도난정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
1892년 12월 삼례도회, 1893년 4월 보은에서 수만 명의 동학신도들이 집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94년 2월 5일 전봉준을 선두로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관아를 습격, 세미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저수지를 파괴하고 해산한 것이
갑오 농민전쟁(동학혁명) 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안핵사 이용태는 이때 봉기한 농민들을 동학도라며 탄압하자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4월에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부르짖으며
김덕명, 손화중, 김개남 등이 이끄는 수만 명 농민군이 체제를 갖춰
무장 영광장성 등 전남북 일대를 차례로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추방하고
그해 5월 31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6월 8일 청나라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 역시 천진조약에 의해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처음 정부는 동학군을 회유하여 전주에서 강화를 맺고 휴전했습니다.
그러나 휴전의 결과는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일본군들이 왕궁을 점령하는가 하면 7월 26일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본의 세력이 점점 팽창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동학군은 10월 12일 삼례회의를 열어
최시형, 이용구 등 북접 온건파의 반대를 뿌리치고 전봉준ㆍ김개남이 북상하게 되자
전국적인 혁명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전봉준의 수만명 호남군과 손병희의 수만명 호서군은
공주에서 관일 연합군과 대결, 격전 분투했으나
근대식 무기와 훈련을 갖춘 일본군에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2천만명 가운데 2백만명 이상이
갑오 농민전쟁에 참여하였으며 30만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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